우리는 세상의 모든 미덕을 자기 수준에서 이해하고 체험합니다.
‘얄팍한 관계’만 맛본 이들도 우정을 알고 체험했다고 말하고 ‘지상 최고의 친밀함’을 맛본 이도 우정을 알고 체험했다고 말하죠.
‘얄팍한 관계’만 맛본 이들도
우정을 알고 체험했다고 말하고
‘지상 최고의 친밀함’을 맛본 이도
우정을 알고 체험했다고 말하죠.
얄팍함이나 절친함이 모두
우정이라는 같은 단어를 씁니다만
둘은 서로 다른 관계라 해도 될 만큼
교감과 깊이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성숙한 교양인과 초등학생이
사용하는 언어가 차이 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정, 정직, 용기, 감사…
이 단어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그래서 모두가 ‘안다’고 생각합니다.
앎의 정도 차이는 무시된 채로.
지혜로운 이들은 단어가 아닌
그 단어가 놓인 맥락을 살핍니다.
화자의 정체성마저 헤아려 챙긴다면
단어 이면의 의미도 엿볼 테고요.
세상에 미덕이 드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지향 없이 실현하기란 어려우니까요.
우리는 ‘깊은 미덕’을 만났는데도
자신이 체험한 ‘얕은 미덕’의 잣대로
눈앞의 대상을 서둘러 판단하고 맙니다.
자신도 이미 아는 미덕이라고, 진부하다고.
지성을 닦거나 지혜로움에 다가서는 길은
새로운 단어를 발견하려는 정열이 아니라
평범하거나 진부한 단어를 새로운 차원에서
인식하고 진득하게 체험하는 여정일 겁니다.
오늘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아는가, 무엇을 알고 싶은가’ 라고.
어떤 것보다 사랑과 우정을 새롭게 알기를,
그리고 감사를 더욱 잘 알기를 기도하면서.
Recent Comments